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일전쟁/오해와 편견 (문단 편집) ==== 공산당 측의 사정 ==== 물론 공산당 역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산당도 "중국이 망하든 말든 우리만 잘살면 그만이지!" 정도까지 막장으로 군 것까진 아니었고 이들도 항일이 당장은 최우선 과제라는 것은 확실히 인식하였으며 점령지의 지나친 공산화 및 정치적 장악을 시도하진 않았다.[* 물론 이는 지나치게 급격한 혁명화를 시도했다가 5차 초공작전 때 피를 본 것에 대한 학습효과이기도 했다.] 소위 '태업행위'에 관해서도 변명할 만한 여지는 있다. '''사실 공산당의 입장으로서는 국민당이 항일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을 사이 세력을 불리는 것이 (도의적인 부분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했다.''' 항일이 보기엔 좋겠지만 그렇다고 얼마 안 되는 역량을 거기에 들이부었다가 일본군에게 몰살당하기 or 항일에 힘을 소모하는 바람에 전후에 국민당에게 몰살당하기를 고를 리는 없지 않은가(...). 국민당도 항일 전쟁만 끝나면 바로 공산당 씨를 말려버리려고 벼르는 상황이었으니. 아니 그 전에 이 둘은 [[국공합작]]이 이뤄지기 전부터 박 터지게 싸우던 관계로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오월동주|적과의 동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공산당 입장에서 보면) 살려면 일단 힘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소련 도움을 받으려고 해도 이미 마오쩌둥은 이념적 차이로 인해 친소 세력을 배척했기 때문에 소련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항일에 집중하는 사이에 국민당이 일본과 협상하여 자신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의심하였고 이는 로스 테릴의 마오쩌둥 평전이나 이시카와 요시히로의 중국 근현대사 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공산당을 못 믿는 것은 장제스 역시 마찬가지라서 그는 공산당에 주기로 했던 지원을 얼마 안 가서 끊어버렸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악연을 생각해본다면 이러한 의심이 없을 수 없었을 터, 따라서 마오쩌둥은 기회가 있을 때 국민당에게 맞설 수 있을 만한 체급을 빨리 구축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고 그 결과물이 바로 전쟁 중에 보인 '교전 회피'와 '해방구 확산 전략'이었던 것이다. 또한 해방구 늘리기와 적극적인 교전 회피는 사실 [[게릴라전]]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군대가 정규군을 상대로 할 때 정석인 전술이었다.[* 현대적 게릴라전의 예시에서 마오쩌둥이 언급되는 것도 이런 게릴라전을 가장 교과서적으로 수행한 게 마오이기 때문이다.] 게릴라군의 주요 전법은 적의 주력 부대와의 싸움을 회피하면서 해방구를 늘려 점령군을 고립시키는 전술로 철도 등 보급로를 향한 사보타주하거나 후방을 위협하여 적군에게 혼란을 걸고 적군의 점령비용을 비롯한 물자 소모를 늘려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식이기 때문이다. 난징 함락 이후 국민당군도 일본군과의 정면 교전을 하는 것 보다는 유격전을 펼치는 식으로 전술이 수렴진화했고, 이후 3세계에서 게릴라들에 의해 식민지군이나 냉전기 미군이나 소련군이 지속적인 출혈을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던 사례가 나온 것을 생각하면[* 사실 베트남군도 [[디엔비엔푸 전투]]를 뺴면 유격전으로 프랑스군의 소모를 늘리는 것에 집중했고, 아프리카 국가들도 군사적으로는 유럽 식민군대를 이기지 못하고 전부 분쇄되었지만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해서 전쟁 수행을 포기하고 물러나게 만든 것이었다.] '군사적으로는' 옳은 판단을 한 것이었다. 게다가 마오가 일본군과의 정면 교전을 피했다고 해서 공산군이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작전을 안했다거나 일본군이 공산군을 공격 안한 것은 아니어서 홍군은 마오까지도 중일전쟁 중에 폭격 등으로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 차례 넘겨야만 했다. 나무위키 [[중일전쟁]] 메인 페이지의 [[https://i.namu.wiki/i/tayVLovZZFxk1lXnafEi8UMtMgrAw9fheof5N9pGiGFI6NPfpaQOT-1XwVh7y4_Y0i63NA2BM2m09NzGdxdVVZ-89sphxypj2w6fXH2TU8SZRPj7AqM4jYg5U2yeLHva1BTIV80fMdm8F8o4Bb7Ayg.webp|전황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만 마오쩌둥이 있던 공산군 본군의 근거지는 일본군 바로 서쪽이었으며, 공산당의 해방구 상당수가 회수 이북의 일본군 점령지에 분포되어 있는 것만 봐도 공산군이 일본군과의 싸움은 도외시하고 세력 늘리기에만 골몰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에서 홍군을 지휘하던 마오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할 부분은 지나치게 군사적인 효율을 중시한 나머지 일본군 점령지와 해방구의 중국 민간인들의 보호를 사실상 포기했던 것이였다.[* 마오쩌둥의 이런 군사적 작전에서의 비정한 면모는 마지막 [[국공내전]]에서 주요 대도시에 포위된 국민당군을 섬멸하기 위해 도시가 아사하든 말든 계속 포위망을 유지하고 인도적 퇴각을 위한 퇴로를 열어주는 걸 거부하는 식으로 표출되었다.] 어쨌든 국민당이 항일에 적극 나선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어서인지, 현재 중국 공산당의 장제스와 국민당에 대한 평가도 많이 바뀌어 심지어 역사교과서에서도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것을 명시해 놓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장제스를 띄워줄수록 그 장제스를 이긴 마오쩌둥도 덩달아 띄워지는 효과가 있는 데다가 [[범록연맹]] 견제 차원도 있다고 하다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